화재경보와 감응 장치
이찬웅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영상예술전공 겸임)
붓다는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 했다. "보라, 모든 것은 타고 있다." 이 화재경보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의 마음 속에서 고통과 그것의 원인인 집착이 끊임없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하나의 사실로서 알리고 있다. 수행의 목표로 삼았던 열반(nirvana)이란 그 불이 완전히 꺼진 이상적인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러나 속세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마음속의 뜨거운 불에 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 불을 다스리고 매만져서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어떤 예술가들에게 불은 디지털 스크린 위로 옮겨져 빛이 된다.
우리가 이런 작품들에서 우선 공통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이 높은 두 벽 사이에 갇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분위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의 성숙은 문제의 속시원한 해결에 있다기보다는 해결하기 힘 든 문제를 어떤 반복을 통해 감당하는 데 있다. 지지킴은 <Mermaid's Night> 등의 작품에서 반복해서 찾아오는 불안과 욕망을 다루기 위해 악몽의 탐구를 자처하는데, 종이 세트장에서 촬영된 이질감과 지극히 제한된 시선, 그리고 불연속적인 몽타주로 구성된 불길한 영상을 보여준다. 전규빈의 종이가 마르는 시간>에서 종이로 만들 어진 주인공은 연약한 만큼 회복을 반복해야 하지만, 회복을 위한 공간이 동시에 구 속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 그 안에 갇혀 있음이 암시된다. 우지윤은 <각인, 축적, 변형, 그리고 연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고통의 원인은 자기의식의 구속력에 있다고 생각하고, 흙벽에 글자를 새겨 넣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혼란스러운 내면을 시각화한다.
다음 두 작품은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가상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한다. 안유하의 <소진의 인터페이스>는 신체적 고통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오래된 모티프인 영혼의 분리와 여행을 가상 세계의 현대적 환경 안에서 다시 한번 상상한다. 이영서는 <e c h o>에서 인간적 감정이 디지털 캐릭터의 외관을 통해서 전달되는 불합리한 상황을 대면하게 하고, 고정된 정체성 없이 불확실한 감정들만이 부유하는 가상 세계의 특성을 환유한다.
예외적으로 손린의 작업은 예술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 위치한다. <(지금 여기를 초월한 모든 것들을 향해) 쉿..!>은 감성적인 것의 분할"(자크 시에르)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해 예술의 포섭과 배제의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고, 빠져나간 것들을 다시 예술적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마지막으로 신예건은 <만남에게>에서 감응의 관계를 인간과 자연적 존재자 를 넘어 기술적 존재자에까지 확장하려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하고 담백하지만, 기술 발전과 생태 위기로 인해 모든 실질적 관계가 부서지고 있는 시대에 그럼에도 예 술이 사람들을, 그리고 인간과 생태와 기계를 새롭게 연결하는 방법을 고집스럽게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감성적 여백을 제공한다.
그러니 이 작품 주위에 맴돌면서 앞서 살펴봤던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면, 이화여대 영상예술전공의 첫 번째 오픈 스튜디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천오백 년 전의 화재경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울리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조금 배운 것이 있다면, 예술의 역할은 고통에 공감하고 존재에 감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새로운 세대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영상과 기술을 통해 실험적인 실천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앞으로 이들이 현대적인 버전의 신비, 마술, 연금술, 환영, 즉 다양한 감응 장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기대해보자.
2025. 6
감정적 후퇴와 자가방어 메커니즘 Emotional Withdrawal and Self-defense Mechanisms
안유하는 영상, 설치, 평면을 매체로 가상 공간이라는 ‘전능’이자 ‘공허’에서 열망을 실현하는 개인을 사실적인 공상의 방식으로 비추어내며, 살아가야 할 삶 - 미공개된 미래에 대하여 사유한다. 안유하에게 컴퓨터 기반의 가상 공간은 현실에 녹아들지 못한 존재가 향하는 곳으로, 늘 신선하고 정돈된 인터페이스만이 맞아주는 정신적 여정의 공간으로서, 이루어지지 못한 갈망을 증폭시키는 공간이다.
《비전달의 시뮬레이션Simulating the Unconveyable》(2025)은 자기구동의 실패와 생명성의 모사에 대한 조형적 실험이다. 낮게 주저앉은 말의 형상 속 가슴 안쪽에서는 붉은 LED 불빛이 미약하게 깜빡인다. 이 불빛은 심장의 박동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생명의 징후라기보다는 단순반복적 기계 작동을 암시한다. 작품의 형상은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동물인 ‘말’에서 출발한다. ‘말’의 오래된 상징은 힘차게 달려나가는 이미지에서 비롯된 육체적 자유(기동성)와 용맹함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달리지 않는다. 낮은 곳에 주저앉아 있고, 딱딱한 플라스틱 외피 속에는 생명 대신 프로그램된 전류만이 흐른다. 이 말은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달려나가야 했으나 도달하지 못한 신호’의 은유적 조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말은 작가의 신체적 결함(자율신경계 이상과 부정맥)에 대한 투사이자, 반복된 실패와 단절의 체험을 외부화한 감정의 지지체다. 이상화된 동물 이미지에 대한 갈망은 실재하는 ‘말’이라는 동물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뮬라크르를 복제하고 그것에 생명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굴절된다. 가상의 형상을 실체로 끌어내려는 욕망, 그러나 완결되지 못한 실행이라는 긴장이 작품의 정서와 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소진의 인터페이스Interface of Exhausition》(2025)는 심장의 불안정성에서 출발한 가상세계로의 도피적 이행을 다룬다. 작 중에서 실제 신체 내부의 위태로운 리듬(부정맥)은 화자를 디지털 환경으로 밀어넣은 근본 동인으로 작용하며, 본 작품은 그러한 이동이 단순한 환상이 아닌 생존의 메커니즘이자 심리적 균형을 위한 조치였음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작품은 심장 모형을 중심으로 한 3D 오브제를 시작으로 가상으로의 여정의 시작을 나타내며, 신체성을 벗어던지는 행위로 스스로의 존재 양태를 전환한다. 심장의 박동은 불규칙하며, 이때의 이미지(애니메이션)는 안유하가 실제로 경험한 몸의 불안정성과 감정적 혼란을 고정불변한 폴리곤이라는 시각적 질료로 번역한 결과이다. 끊임없이 소진되는 신체의 성질을 디지털 지지체로써 전환시키고, 이후 현실의 시공간적 규칙 및 맥락과 동떨어진 가상에서의 또다른 불안을 그려낸다. 가상세계의 이미지들은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공간이자, 불특정한 타인의 영혼들을 마주하는 공간으로 그려낸다. 그들과 관계를 맺고 욕망하면서도 끝내 접촉할 수 없는 대상으로, 현실로의 회귀에 불을 지피는 계기로 작동한다. 작품은 여정과 회귀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서 ‘소진의 인터페이스’는 닳고 부식되는 신체이자, 디지털 가상세계로의 필연적 이행을 실행하는 신체로서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불투명을 넘어 새로운 들판으로Through Opaqueness, into a New Field》(2025)는 말의 공간(들판) - 말을 만드는 가상공간(하얀 방) - 실제 작업실 세 가지 층위의 공간이 교차되며 상황이 제시된다. 영화는 작은 말의 모형이 바닥으로 ‘떨어짐’에서 시작한다. 들판 위의 하얀 사람은 말을 표상하며, 작업실에서 공급되는 전기에 의해 생명력을 얻고 그의 공간에서 달리기도 하지만 결국 들판 위에서 기력을 소진한다. ‘떨어짐’의 감각은 발이 없는 말의 조각으로 매개되고, 들판 위에 쓰러진 하얀 사람의 몽타주로 재매개된다. 또한, 앞선 연작에서 제시된 신체적 결함의 투사로서 존재했던 말의 모티프는 영화 속 몽타주로서 기능하며, 발이 없는 말 조각이 바닥과 잔디 위에 떨어지는 감각으로 재매개된다.
안유하의 작품은 감각을 고정된 내면적 체험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은 다중의 매체 지지체를 가로지르며 유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3D 모델링, 오브제, 실사 영상이라는 매체적 구조를 통해 감각은 반복적으로 재매개되고, 그 과정에서 감각은 더 이상 전달되는 대상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는 것, 혹은 흐름으로 확장되는 것이 된다. 마셜 맥루한의 “모든 매체는 인간 감각기관의 확장이다”라는 선언은 감각이 매체를 통해 외부화 되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외화는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감각 구조 자체의 재조정이며 재형식화다. 특히 전자 미디어는 신경계의 외부화를 가능케하며, 감각 간 위계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감각환경을 구축한다. 이때 감각은 더 이상 내부의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조형적 이미지와 반복적 구조를 통해 매체를 통하여 경험된다.
안유하
2025. 6
붕 뜬 존재의 사실적인 에세이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는 그들은 웃고, 울고, 부끄러워하고, 노려보고, 기뻐하고, 화낸다. 평평하고 도톰한 형상으로서 현현하는 인물들은 - 우리에게 실존하였던 것으로 인식되는 - 오래된 감정을 매만진다. 감정의 기억과 현재의 불안은 필연적으로 대화하고, 그것들은 걷잡을 수 없는 미래를 쏟아내듯 만들어낸다. 내가 그리는 비현실적인 미래는 우연이 아니다. 공허로 겹겹이 쌓아 올린 그림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조차 모르는 비겁한 스스로에 얽힌 수필이다.
현실에 녹아들지 못하고 붕 떠버린 존재가 향하는 곳은 그 모든 것들과 유리된 것처럼 느껴지는 - 실제로는 현실의 타인들이 자아내는 자질구레함을 지워내고, 늘 프레쉬한 인터페이스만이 맞아주는 - 가상의 어딘가이고, 그가 적어내리는 수필에는 실재하는 타인과의 연결을 향하여 질투와 냉소와 애정을 이야기한다. 나는 가상 공간이라는 ‘전능’이자 ‘공허’에서 열망을 실현하는 개인을 사실적인 공상의 방식으로 비추어낸다. 또한 내가 살아가야 할 삶 - 미공개된 미래에 대하여 사유한다.
안유하
2024. 12